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슐리펜 계획 (문단 편집) == 몰트케가 망쳤는가? == 슐리펜 계획이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예비군의 작전 수행 능력 부족과 철도 보급 수송 능력의 약화 및 그로 인해 계획의 핵심인 빠른 진격 속도를 전개할 수 없었던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다.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슐리펜 계획의 실패 원인이 [[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]]가 완벽했던 계획을 무리하게 수정한 탓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결론적으로 한계가 있는 시각으로 평가된다. 이러한 주장은 [[제1차 세계 대전]] 종전 이후 독일 사학자들이 슐리펜 계획은 승리의 청사진과도 같은 완벽한 계획이었으나 몰트케가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의견을 자평한 것에 기반한다. 이러한 조류를 이끈 것은 독일군 고급장교들로, 이들이 전후에 작성한 회고록으로 인해 속전속결로 끝났어야 할 슐리펜 계획이 4년간의 소모전으로 변질된 것은 순전히 몰트케의 잘못이지, 독일의 전략적 계산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'서사'같은 이야기가 성립되었다. 하지만 [[1956년]] 게르하르트 리터의 '''슐리펜 계획 미신 비판'''(Der Schlieffenplan: Kritik eines Mythos)이라는 이름의 책이 출판되면서 슐리펜 계획이 승리를 위한 청사진이었다라는 관점은 재평가된다. 승리의 청사진 따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대 몰트케 이래로 정립된 군사 작전이 선천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는 프로이센의 전쟁계획 전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. 기동 계획이나 배치 계획 정도는 만들어질 수 있으나, 전역 계획 따위는 아무 짝에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. 1970년대부터는 다양한 학자들이 벨기에를 통한 프랑스 침공작전의 실용적 측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. 이들에 따르면 애시당초 독일-벨기에-프랑스 철도망과 벨기에-북프랑스 도로교통망은 물리적 한계로 인하여 충분한 수의 병력을 충분히 빠르게 이동시킬 수 없었다. 슐리펜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속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던 셈이다. 몰트케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이러한 서사같은 이야기가 퍼진 이유는 [[1914년]] 이전에 독일 참모들이 작성한 관련 기록들이 대부분 기밀이었고 문서들이 1945년 4월 포츠담 폭격으로 프로이센 육군기록보관소가 파괴될 때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. 폭격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기록들마저도 냉전이 시작되자 [[동독]] 측이 가져가 버려 [[독일 재통일]] 이후에야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[* 1930년대 독일에서 1차대전 이전 독일 참모본부의 전쟁계획을 연구하는 데 쓰인 문서 RH61/v.96 같은 경우 2000년대 들어서야 동독 지역에서 발견되었다.] 이 자료들로 인해 최초로 독일의 전쟁계획에 대한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. 결과적으로 1918년 1차대전 종전 이후에 나온 몰트케의 슐리펜 계획 수정안과 같은 분석들은 대부분 틀린 것으로 규명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